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선조 31년(1598) [[임진왜란]] 최후의 해전인 [[노량해전]]에서 전투 도중 충무공 [[이순신]]이 전사하자, 시신을 처음에는 노량해전의 전장이던 [[남해군|남해]]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순신 재직 시 마지막 [[삼도수군통제사|통제영]]이 있던 [[고금도]]로 옮겼다. 그해 말(대략 [[음력]]으로 12월 즈음)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고향인 아산[* 본래 이순신이 태어난 곳은 서울 한복판이지만, 어린 시절부터 아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안장하려 했던 것 같다. 이순신의 묘가 있는 곳 입구에는 부친을 비롯한 형제들의 무덤도 있고,이순신을 모신 아산 현충사 경내에는 이순신의 아들 이면의 묘가 있다.]으로 운구하여 이듬해 선조 32년(1599) 2월 인근 금성산(음봉면 산정리)에 모셨다가, 이순신이 [[공신|선무공신]] 칭호를 받고 [[좌의정]]으로 추증되자 광해군 6년(1614)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른다. 이후 정조 18년(1794) [[영의정]]으로 추증되면서 정조가 어제신도비를 하사하였는데, 임금이 신하에게 신도비를 직접 내린 경우는 이순신이 유일하다.[* 물론 그 이전에 신도비를 받기는 하였다. 묘소에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비석 두 기 중에 [[http://asan.grandculture.net/asan/search/GC07100598?keyword=%EC%9D%B4%EB%B4%89%EC%83%81%20%EB%AC%98&page=1|비각이 있는 비]]로서 숙종 19년(1693)에 세워진 것이며, 글씨는 [[김육]]이 쓴 것이다. 그 옆의 비는 5대손 [[이봉상]]의 신도비이며, 정조가 친히 지은 신도비는 봉분 안쪽 우측에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.] 해방 이후인 1973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맞춰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